태극기 휘날리며 정보 및 줄거리
강제규 감독이 연출했고 2004년에 개봉한 장동건, 원빈 주연의 6.25 한국 전쟁을 다룬 영화이다.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작품 중 하나로, 감정의 깊이, 강렬한 액션 시퀀스, 강력한 연기로 폭넓은 호평을 받았다. 가장인 진태(장동건)는 약혼녀인 영신(이은주)과의 결혼과 진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나뿐인 동생 진석(원빈)의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1950년 6월의 어느 날,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 두 형제는 갑작스레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다. 동생과 같은 소대에 배치된 진태는 아직 학생인 동생의 징집 해제를 위해 대대장을 만난다. 그 후 동생의 생존을 위해 총을 들며 훈장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진석은 진태의 바람과 달리 실전에 참여하게 된다. 전장에서 진태가 진석을 살리려다가 주변의 동료들이 죽음에 처하게 되어 진석과 진태의 갈등이 생겨난다. 한편 사인하면 쌀을 준다는 말에 영신(이은주)은 사인을 하고 쌀을 받아온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고 공산당으로 몰리게 된 영신(이은주)은 끌려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진석과 진태는 그녀를 구하러 가지만 결국 영신은 총살을 당한다. 그 일이 있은 후 다른 전투에 참석한 진석마저 죽었다고 생각한 진태는 정신이 나가버리고 북한군으로 합류하게 된다. 그런 진태를 모르고 진석은 형을 찾아다닌다. 우여곡절 끝에 두 형제는 극적으로 한 전투에서 만나게 된다. 정신이 나가버린 진태는 진석을 마주쳤을 때 알아채지 못한다. 이에 진석은 애절하게 형을 부르고 진태는 겨우 진석을 알아보게 된다. 이내 정신을 차린 진태는 너무 위험한 상황으로 인해 진석에게 곧 가겠다며 진석을 먼저 돌려보낸다. 진태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중국군에게 총을 겨누며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 이후 50년의 세월이 지난다. 진석이 진태의 유골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게 되어 급히 찾아간다. 뒤이어 형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는 노인이 된 진석의 모습으로 막이 내린다.
비하인드 스토리
모티브가 된 것은 전쟁기념관에 있는 '형제의 상'의 실화 내용이라고 한다. '형제의 상'은 실제 형제였던 박규철 소위(형)와 박용철 하사(동생)의 이야기이며,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 출신인 형제는 이북 땅에 소련군이 들어서면서 형만 월남하고 동생은 이북에 남은 상태에서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형은 대한민국 육군으로서, 동생은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우연히 둘은 원주 치악고개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영화 속 내용과는 달리 동생은 형을 따라 남쪽으로 귀순했다고 한다. 특히 주목할 점으로 이 영화는 국방부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메이킹북에 따르면 감독은 "전쟁영화이기에 국방부 지원을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해서 7개월 간의 접촉을 했다. 하지만 결국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육군 측에서 수십 가지의 시나리오 수정 요구가 있었고, 감독은 본질을 왜곡하면서 영화를 제작할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국방부는 6.25 전쟁에서 민간인과 학생을 강제 징집했던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해 제작 지원을 받으려면 진태와 진석이 자원입대 하는 것으로 수정하라고 요구했지만, 감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감독의 강경한 태도가 명작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이 되는 한국전쟁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은 한국뿐만 아니라 국제 정치, 그리고 미국과 소련 간의 광범위한 냉전 경쟁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이전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일제의 억압과 착취, 문화적 억압에 직면하여 강한 열망을 품게 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국은 일본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에 의해 두 개의 별도 점령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분단은 일시적이었으나 한반도 통일 노력은 실패로 끝났고, 남쪽에는 대한민국(남한),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라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념적 차이가 심화되면서 남북한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김일성이 주도하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고, 남측은 이승만 지도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자본주의, 반공주의 입장을 채택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기습 남침하여 38선을 넘어 수도 서울을 향해 전진했다. 이 침략으로 한국과 그 동맹국들은 허를 찔렸고 한반도 전체를 침공할 위협을 받았다.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고 북한군을 격퇴하기 위한 군사 개입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이 주도하고 한국을 포함한 다양한 유엔 회원국의 군대로 구성된 다국적 연합군이 한국 방위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됐다. 한국 전쟁은 치열한 전투, 높은 사상자 수, 상당한 영토 이동으로 잔인했고, 이 전쟁은 장기간의 갈등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북한군의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은 증원군과 공중 지원을 받아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밀어내고 서울을 탈환했고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엔군이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에 접근하자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을 대신하여 개입하여 대규모 반격을 감행하여 결국 합의 끝에 38선을 그어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었다. 이 전쟁으로 양측은 수많은 손실을 입게 되었고, 아직까지도 분단의 상황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