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정보 및 줄거리
이 작품은 2014년에 개봉했고, 이순신 장군의 명량 해전을 다룬 한국 영화이다. 감독은 '최종병기 활'을 연출한 김한민이고, 최민식 배우가 이순신 역할을 맡았다. 총 관객 수는 1761만 6141명이고, 역대 대한민국 영화 시장 관객수 1위 기록이다. 이 기록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막바지인 1597년에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한 후 한양에서 고문을 받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비운 자리를 꿰찬 원균이 이끌던 조선의 수군은 거제도 앞바다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왜군은 다시 한양으로 북상할 계획을 세운다. 훗날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고, 칠천량에서 살아남은 판옥선 12척을 인수한 뒤 진도 벽파진에 보루를 세운다. 그러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남 어란진에는 300척이 넘는 왜군 전선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조선군의 상황은 말 그대로 피폐했고, 군사들도 혼란스러워했다. 한양에서는 수군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적수가 안된다며 육군으로 합류하라 했지만, 이순신은 수군을 파할 생각이 없었다. 진도 벽파진에서는 구선(거북선)의 상판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오고, 조선 전선은 고작 12척, 왜군 전선은 330척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조류를 이용해 화포를 쏴 최대한 많은 왜군 전선을 격침하고, 왜군 전선과 가까워졌을 때 갑판 아래쪽 문을 열어 모든 포를 한쪽면으로 모아 일제히 사격해 왜군 전선을 날려버린다. 이후 조류가 역류로 바뀌며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로 인해 구루지마는 피섬을 장악하려 하고, 안위의 함선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순신의 대장선 쪽으로 자폭선을 보내고, 포로로 잡혀있던 임준영의 지시로 그의 아내와 백성들이 소리쳐 자폭선을 발견해 파괴해 버린다. 이후 구루지마의 안택선이 대장선을 들이받으려다 회오리에 휩쓸리며 다른 전선들과 부딪히며 파괴되고, 이순신의 대장선과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구루지마는 이순신을 처단하려 대장선에 타고, 결국에는 이순신에게 참수당한다. 참수당한 구루지마의 목이 대장선에 걸리자 일본 본대가 참전하게 되는데, 물살이 조선수군 쪽에 유리한 상황이라서 왜선들이 박살 나버린다. 와키자카는 이 상황을 보다가 퇴각명령을 내리고, 이로써 명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순신과 명량해전
당시 시대상황은 1597년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중요한 해전인 명량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전투의 역사적 배경은 풍부하고 복잡하다. 이순신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뛰어난 전술, 흔들리지 않는 충성, 일본 침략자들에 대한 놀라운 승리로 유명한 한국 해군 사령관이자 전략가로 평가된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히데요시는 궁극적으로 중국 침략을 위한 디딤돌로서 한국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1592년 일본군이 해상과 육지를 통해 한국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당시 한국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과 우월한 수적, 기술로 인해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많은 한국 해군 사령관이 패배했고, 일본군은 상당한 진전을 이루며 주요 전략 지점을 점령했다. 이러한 혼란과 좌절 속에서 이순신은 1592년 조선 수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정치적 음모로 인해 조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해군 전문성을 인정한 선조는 그를 한국 수군 사령관으로 복직시켰다. 이순신은 지휘권을 잡자마자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 해군은 많은 선박이 파괴되고 사기가 저하되는 등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순신은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엄격한 훈련, 규율, 개혁을 시행했다. 그는 또한 대포를 장착한 중장갑 전함인 유명한 "거북선"과 같은 기술 혁신을 도입했다. 전쟁 초기에 이순신은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뛰어난 전략적 능력과 거북선의 막강한 능력이 결합되어 그는 일본 해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고 보급선을 방해할 수 있었다. 특히 명량해전은 1597년 10월 26일에 일어난 결정적인 해군 교전이었다. 이순신은 단 12척의 작은 함대로 300척이 넘는 일본 함대와 맞섰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위험한 해류와 지역 해역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활용하여 적을 좁은 명량 해협으로 통과시키는 훌륭한 전략을 고안했다. 놀라운 전술적 천재성을 선보인 이순신의 함대는 자신의 함선 한 척도 잃지 않고 30척이 넘는 적함을 침몰시키며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이와 같이 명량해전은 임진왜란의 전환점이 되었고, 일본의 진격을 막고 한국인의 사기를 고양시켰다.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군 사령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수많은 도전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1598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조국과 국왕에 대한 충성을 확고히 지켰다.
국내 평가
많은 비평가들은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작품의 노력을 칭찬했다. 당시의 해전 전술을 세세하게 묘사한 점, 이순신 장군의 인격과 리더십 스타일을 정확하게 표현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특정 특성화나 특정 사건과 같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취한 사소한 부정확성이나 창의적 자유를 지적했다. 그렇지만 시나리오가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김한민 감독의 연출은 영화 전반에 걸쳐 긴장감과 설렘을 자아내는 연출력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비평가들은 능숙하게 안무를 짜고 촬영한 강렬한 전투 장면들을 칭찬했다. 특히 해전 장면을 촬영한 영상미는 몰입감이 부각됐다. 비평가들은 역사적 대결의 규모와 격렬함을 재현하기 위해 CGI와 실제 효과를 사용하여 관객을 액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점에 주목했다. 더불어 배우 최민식의 이순신 장군 연기가 호평의 포인트였다. 비평가들은 역사적 인물의 탄력성, 결단력, 전략적 탁월함을 포착하여 그의 미묘한 연기를 칭찬했다. 조연 배우들의 연기도 호평을 받아 전체적인 서사에 진정성과 감정적 깊이를 더하는 데 기여했다. 전반적으로 국내 평론가들은 시나리오의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놀라운 영상미, 역사에 대한 경외심을 압도적으로 칭찬했다. 서사적인 전쟁 영화일 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의 불굴의 정신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호평을 받았다.